흑석동.
조선시대에는 왕들의 놀이터,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 부호들의 별장, 해방 이후에는 피난민들의 터전 - 수백 년 가까이 사람의 손을 타온 동네이다. 수백 년 간 온갖 변화를 겪어 온 이 동네가, 지금도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.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, 낡은 벽돌 건물들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넓고 쭈욱 뻗은 도로, 통유리 덮인 아파트가 만들어지고 있다.
재개발은 달콤쌉싸름하다. 노후화된 주거지가 현대화된다.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큰 돈을 벌 것이다. 하지만, 수십년간의 발자국들이 지워지고 잊혀진다. 어릴 적 친구들과 뛰어놀던 추억이 사라진다. 익숙하고 정든 거리가 없어진다.
나는 이 재개발의 과정을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봤다. 나는 사람 냄새 나던, 주말이면 애기들 공들고 나와서 뛰어 놀던, 저녁 시간되면 집집마다 밥 짓는 냄새가 솔솔 나던 동네가 하루 아침에 썰렁한 빈거리가 되는 과정을 지켜봤다.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길거리엔 몇 주 지나지 않아 풀이 무성하게 자랐고, 멀쩡히 서있던 벽과 유리는 금이 가고 깨져 갔다.
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, 나는 사람이 있다가 없어진 이 곳에서 사람의 흔적을 찾기로 하였다.
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변해가는 번잡한 도심 속, 1년 가까이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곳, 2022년 11월에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 곳, 흑석동 제11구역을 소개하고자 한다.